박석환, 분업형 공동 창작 시스템이 만들어 낸 80년대 캐릭터 스타일을 넘어, 온라인 코코리뷰, 2002.10.07


- 허영만 만화를 중심으로 -


이상무, 이현세 그리고 허영만


만화작가 허영만은 한 인터뷰에서 ‘당신은 왜 한번도 1등을 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70년대는 독고탁의 이상무가 1등이었고 80년대는 까치의 이현세가 1등이었다는 식이다. 그의 작품이 2등이었다는 것에 동의 할 수는 없지만 그의 인기가 두 작가보다 못했던 것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보아 인정해야겠다. 그 역시 ‘우리 어머니는 항상 7홉만 하라고 했다’는 말로 대중적 인기에서 밀렸음을 시인한다. 

80년대 초중반은 만화체와 극화체 그리고 상반되는 화풍을 동시에 사용한 혼합체, 또 순정체 등이 혼재되는 양상을 보여주면서 만화전문잡지나 만화가게의 서가를 다양한 화풍 경연장으로 만들었다. 80년대 중반까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이상무는 가족만화 항일만화 스포츠만화 등에서 만화풍의 캐릭터와 가족사 중심의 감동적 스토리로 다수의 걸작을 남겼다. 80년대 초중반부터 최고작가 자리를 넘겨받은 이현세는 완연한 극화풍을 보여줬고 성인취향의 스포츠만화 등에서 사랑과 열정을 소재로 한 작품을 다수 창작하며 가장 대중적 인기를 얻은 만화작가가 됐다. 특히 그가 특허 등록까지 했던 주인공 캐릭터 까치와 이현세 스타일의 그림형식은 당대 만화가게 만화를 대표하는 화풍이 된다. 

만화체에 가까웠던 순정만화작가 엄희자와 이향원 문하를 거쳐 74년 데뷔한 허영만은 <각시탈>을 발표하며 다양한 화풍을 섭렵하고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이상무 김철호 김영하 등이 잡지연재만화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시절에 허영만은 만화가게용 만화를 그리다가 잡지연재를 시작하며 스포츠만화 열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시 만화계는 만화가게용 만화를 전문으로 그리던 이른바 신촌파와 잡지연재만화를 전문으로 하던 창작만화팀이 지금의 일일만화작가와 잡지연재만화작가와 비슷한 구도로 형성돼 있었다. 허영만은 독자층 창작스타일 유통환경이 전혀 다른 두 무대에서 나름의 성공을 거둔 것이다. 

80년 전문만화잡지 <보물섬>이 창간되면서 만화창작 형식에 또 한 차례 변화가 일었다. 당시 <소년중앙> 등의 잡지를 통해 인기를 얻고 있던 이두호는 <보물섬>이 생기면서 편집자들이 예전과는 전혀 다른 치밀한 배경을 요구했다고 한다. 명랑만화풍의 우스개 그림 스타일이 쑥 빠지고 치밀한 인물과 배경 묘사가 요구됐던 것이다. 이에 따라 만화연출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이야기 진행 방식 보다는 극영화를 보는 듯한 화면구성 등이 주류를 이루기 시작했다. 


대작 열풍과 함께 찾아든 만화 부흥기


이른바 3S로 대표되는 스크린 스포츠 섹스를 중심으로 한 대중오락 문화의 발전은 만화를 비롯한 시각문화 전반을 변화 시켰다. 만화도 이 시기를 중점으로 급속도로 영화적 요소를 포함시켜갔고 스포츠의 역동성과 섹스의 오락성이나 대리만족감을 주요한 장치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문화 전반의 빠른 변화는 만화의 과장성이나 단순화를 그림 묘사의 사실주의적 바탕하에서 이뤄지도록 만들었다. 또 일본순정만화 <캔디캔디> 등 사실적 그림체와 영화적 화면구성을 지닌 불법 복제본이 커다란 인기를 누린 것도 한 이유가 됐다.  

<둘리>의 김수정 등을 예외로 하면 만화풍에 가까웠던 이상무 김영하 등은 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전과 같은 인기를 누리지 못했다. 반면 이현세 박봉성 고행석 등이 인기 작가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이들 작품의 특징은 내용이나 소재와는 별개로 완연한 극화체로 대표될 수 있다.  허영만은 만화풍에 가까웠던 이향원 식 만화를 창작하는 한편 <무당거미> 등의 작품을 통해 극화체로도 명성을 쌓으면서 두 시대를 잇는 역할을 했다. 

80년대는 만화사에 있어 상당히 많은 변화와 새로운 시도가 있었던 시기였다. 극화의 열풍과 함께 작품의 규모는 전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해지기 시작했다. 전후 상중하 길어야 5권 수준이었던 작품들이 10권을 기본으로 많으면 60여 권짜리도 등장했고, 특정 작품이 인기를 끌면 2부 3부를 내는 것도 이 시기에 정착됐다. 이 시기의 대표작가 중 대다수는 만화가게용 작품을 주로 했었기 때문에 작품의 창작 형식도 유통의 특수성에 따라 변하기 시작했다. 기존 만화가 지녔던 함축적 묘사는 장대한 서사 구조 속에서 숨겨졌고 대사와 화려한 컷 중심의 이야기 전개가 이뤄지면서 쪽수는 한없이 늘어나기만 했다. 만화가게 에 판매하는 것이 출판 수익의 전부였던 출판사는 회독률과 가격상승 효과를 위해 책의 쪽수를 100여 페이지 수준으로 줄였고 작품의 호흡도 그에 따라 달라졌다.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만화가게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현재 인기 중견작가들의 대개가 당시에 등장했고 역대 국내 만화 걸작 등 중 다수의 작품이 이 시기에 출판됐다. 


이현세 유 또는 까치 스타일


당시 <20세 재벌>이란 작품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박봉성은 이현세와 함께 이 시기를 가장 화려하게 장식한 작가 중 한명으로 현재까지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이 31권짜리 대작이었고 박봉성은 50여권이 넘는 <신의 아들>이라는 대작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후 김철호가 <스콜피온> 시리즈를 5부까지 창작하며 최고권수 기록을 재수립하는 등 상당기간 동안 대작열풍은 식지 않았다. 이런 대작 열풍과 초특급 베스트셀러 만화의 등장은 만화 붐을 주도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악화를 재생산하는 구조를 만들기도 했다. 당시 만화가게 이름 중 상당수가 ‘까치만화’ ‘엄지만화’ 등의 간판을 내걸었을 정도로 이현세의 인기는 폭발적이었고 이현세의 새 작품을 찾는 독자의 요구는 상상을 초월했다. 만화가게 주인들은 이현세 만화를 찾는 독자에게 시달리다 못해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댔고 일부는 빨리 책을 내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식의 협박까지 했었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는 이현세 아류작가들이 양산되는 구조를 만들어냈다. 박원빈 조남기 장훈 조명운 조명훈 강촌 하아미 등 수많은 작가들이 까치머리에 청잠바를 입은 오혜성과 앵두입술의 엄지를 비슷하게 묘사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허영만 등 몇몇 인기작가의 경우 독자적인 캐릭터를 유지하기도 했지만 주변 캐릭터의 설정에 있어서는 엄지 마동탁 백두산 손병호 등으로 대표되는 이현세 유를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당시 만화 주인공의 대개는 서부극이나 무협소설의 주인공처럼 특수한 능력이 있으나 떠돌이의 정서 또는 태생적 한계에 따른 부정적 시각을 고수하고 있었다. 한의 정서를 지니고 있고 복수를 위한 수련과정을 거치며 처절한 응징보다는 화해를 이끌고 자기자리로 되돌아간다는 식이다. 군부통치에 길들여지고 민주화 의지가 어느 때보다 높았던 80년대의 시대적 배경이 개인을 억압하고 분출의 욕구를 증폭시켰던 탓도 있겠고 그것이 곳 무협이라는 판타지의 공간을 불러온 것일 수도 있으나 다른 견해도 있다. 무협소설가로 명성이 높은 검궁인은 이와 관련 당시 만화가게의 절반수준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무협지가 만화의 대중적 인기에 눌리면서 무협작가들이 만화스토리작가로 전업을 하게 됐고, 무협소설의 이야기 구조가 그대로 만화작품에 주입되면서 생긴 것이라고 말한다. 


분업형 공동창작 시스템과 캐릭터 규격화


만화전문 스토리작가의 출현과 대작 열풍, 그리고 까치라는 대중적 캐릭터의 등장 등이 맞물리면서 만화창작은 작가 개인의 작업이 아니라 분업형 공동창작 작업으로 발전했다. 허영만은 물론이고 이현세 박봉성 고행석 등의 작가들과 까치 유 만화로 인기를 끌었던 다수의 작가들이 A팀 B팀 하는 식으로 팀당 10여 명 이상의 파트별 전문작가를 두고 작품을 생산해냈다. 특정 작가의 경우 한달에 100여 권을 낸 경우도 있을 정도였고 파트별 전문작가 200여 명이 작업하는 화실이 운영되기도 했다. 

대규모 인원을 중심으로 한 다작 시스템이 구축되면서 주요 등장인물들의 설정과 그림묘사가 규격화됐고 스토리 스크립트 데생 배경 펜터치 마스크 톤 뒤처리 등의 작업 공정이 세밀하게 분류됐다. 특정 소재나 주제가 잡히고 몇 가지 사건이 나열되면 규격화된 등장인물을 자동적으로 배치하고 분화된 작업범위를 파트별 전문작가들이 작업하는 형식이었다. 

분업창작의 문제점을 최소화하기 위해 작업감독이 된 작가들은 캐릭터의 묘사법을 주도적으로 변화시키는 경우도 있었고 되풀이되는 작업과정을 통해 자연 발생적으로 캐릭터가 변화되기도 했다. 즉 주요 등장인물의 묘사하기 어려운 부분이 사라지고 가장 쉽고 빠르게 그리는 방법이 정형화 된 것이다. 이런 특징은 까치 이강토 최강타 등 당대 최고의 캐릭터들 사이에서 모두 동일하게 찾아 볼 수 있는 현상 중 하나이다. 허영만이 당시에 작업한 등장인물들의 얼굴묘사를 보면 대개 근골형 날림 터치로 그려져 있다. 그보다 앞선 시기의 작품이나 최근의 작품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이런 방식은 작가의 손맛이 깊게 자리한 부드러운 곡선이나 꾹꾹 눌러 그려야 표현되는 펜터치의 농담을 전면 배제한 것이다. 마징가처럼 각진 얼굴형을 속도감 있게 그릴 수 있도록 함으로서 작업속도와 효율성을 높인 것이다. 또 까치머리가 만화주인공의 헤어스타일로 인식되던 당시에 독특하게 펑크머리 스타일을 했던 이강토의 경우 이를 갈기 머리 모양으로 변화 시키기도 했다. 작업 시간 단축을 위한 조치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현세 아류를 창작하던 

몇몇 작가의 경우는 짧고 힘 있는 펜터치로 표현됐던 까치머리를 갈기 머리 모양으로 변형하면서 오히려 나름의 차별성을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작업 효율을 위한 혐의는 여전하다. 당시 이런 창작 시스템과 관행은 작품의 질적 저하를 가져오면서 수 많은 문제점을 양산해냈고 독자가 이탈하는 현상을 가져왔다. 허영만의 경우 당시를 마치 공장장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허영만은 당시 작가 중 가장 먼저 공장제 분업 창작 중단을 선언했다. 이어 이현세도 이의 중단을 약속했으나 지켜지지 않고 있다. 허영만의 경우도 간헐적으로 팀에 의해 분업 창작된 전작 단행본을 출판하고 있다. 


소재주의로 벗어던진 80년대 캐릭터의 무덤


80년대를 대표했던 만화작가 중 허영만 만화의 캐릭터성은 상대적으로 명확하지 않다. 이현세의 까치가 운명적이고, 박봉성의 최강타가 신적이라면 허영만의 이강토는 무척 나약한 근성을 지녔다. 초창기 인기작 <각시탈>을 출발로 가면 또는 두얼굴의 이미지를 작품 속에서 꾸준히 보여주고 있는 허영만의 이강토는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지속적으로 담아 가고 있으며 작품의 결말까지도 이 해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는 동 시대 최고 인기 작가였던 이현세나 박봉성의 경우와는 상반되는 것으로 이들의 주인공은 확신형 인물이었다. 분명하게 자기의 노선을 지니고 있으며 그 노선을 지켜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때문에 까치 또는 오혜성과 최강타의 캐릭터는 작품 속에서 화려하게 제자리를 잡고 있고 대중에게 각인되어 있다. 반면 이강토는 <무당거미> <카멜레온의 시> 등을 통해 제각각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또 다른 작가의 경우와는 다르게 이강토에 연연하지 않고 복수의 캐릭터를 등장시키고 매 작품에 맞는 새로운 주인공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현세가 90년 중반에 접어들면서 까치를 버렸으면서도 주인공을 까치의 설정에서 움직이지 않은 것과도 구별되는 부분이다. 이는 70년대에서 80년대로 접어들면서 작풍의 변화가 있었을 때 1등의 위치에서가 아니라 2등의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과 작품의 방향성을 재설정 할 수 있었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 또 매번 새로운 소재에 도전하고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 내면서 캐릭터 자체의 인기보다는 허영만이라는 브랜드 또는 브랜드 작품에 충실했던 까닭도 있을 것이다. 도박 경마 등 잡기만화와 기업 정치 골프 요리 등 전문소재 만화를 창작하면서 소재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지만 캐릭터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새로운 소재와 그에 준하는 캐릭터를 발굴하면서 자신의 작품 세계를 규격화 시키지 않았던 노력이 결국 90년대를 넘어 현재까지 허영만의 롱런을 가능하게 한 힘일 것이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온라인코코리뷰, 2002-10-07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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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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