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환, 만화가 잘 자라야 애니메이션, 코코리뷰, 1998.12.25

코코리뷰, 한국만화문화연구원, 1998-12-25 게재

 

 

 만화평론가 손상익은 92년 <만화세상이 오고있다>라는 제목의 만화평론집을 발표했다. 그리고 이어 95년 <만화로 여는 세상>을 발표하고, 최근 <한국만화통사>를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한 평론가의 저술 성과로 90년대 이후의 만화를 얘기하자면 이렇다.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며 천덕꾸러기 신세에 놓여있던 ‘만화’라는 매체가 새로운 문화의 주역으로 떠올랐고, 자기만의 세상(‘만화세상’)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세상의 도래가 예견된 후, 급속도로 성장한 만화는 이제 자기만의 영역에서 탈피 세상으로 들어와 있음을(‘만화로 여는 세상’) 말한다. 세상이 터부시했던 ‘만화’. 그로인하여 움직여지는 세상.


  90년대 우리 만화가 이룬 쾌거, 그리고 그에 대한 기대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한 세기의 끝자락에서 기술된 만화의 역사(‘한국만화통사’)는 그리 유쾌하지 않다. 일제에 의한 만화교육, 도제식 만화 수련, 공장제 만화제작 풍토, 대여 위주의 구독환경에 대한 고발. <한국만화통사>에 기술된 이 유쾌하지 않은 면모들은 오늘에도 유효한 것들이다. 만화세상이 오고, 만화로 여는 세상은 그저 만화를 사랑하는 일개인의 바램이었을뿐 우리만화의 일신을 위한 성과로 이해되고, 실천되지 않고 있다. 



1. 만화산업에 대한 기대, 그러나 ‘만화는 없다’. 


  우리는 이제 한번 더 그의 바램을 끄집어내고, 스스로를 타박해야 하는 상황에 있다. 오래전 우리는 만화방을 초등학교 주변에서 몰아내는 대가로 책대여점을 선물 받았다. 책대여점은 IMF이후 급속도로 팽창했고, 우리만화의 존재 자체를 우습게 만드는 일본만화의 보급소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가 받았던 선물은 시한폭탄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우리는 그런 종류의 시한폭탄을 손에 쥐었다. 애니메이션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기억한다. 애니메이션의 호황을 위해 만화가 움직였던 시간들을. 물론 애니메이션에 대한 관심은 전 지구적이다. 국가・인종간의 장벽을 넘어 새로운 영상문화의 중추 역할을 담당할 것이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은 모두가 공감하고, 이해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만화는 이를 분신 정도로 믿고 있었다. 그저 잘 키워야 될 자식 정도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 만화에게 있어 가장 강력한 라이벌 중 하나는 애니메이션이다. 그것도 모른채 우리는 애니메이션을 만화에 포함 시켜야 한다고 떠들었고, ‘만화의 날’을 제정하자고 모인 자리에서 찬반 투표를 통해 ‘애니메이션도 만화다’라고 큰 소리로 소리쳤다. 그렇다. 애니메이션도 만화일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애니메이션이 만화일수 있을지는 의심해 봐야 한다. 만화는 여전히 출판매체의 한 영역을 담당하고 있다. 종이가 아닌 새로운 정보의 저장매체를 통하더라도 만화는 평면적인 공간, 정영상의 세계를 벗어나서는 그 고유한 특성들을 지닐 수가 없다. 만화가 나름의 운동성을 확보하고 발전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정영상의 연결성에 의한 것일 때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내렸던 만화에 대한 모든 정의들은 수정돼야 마땅하다. 이 공간을 벗어나는 만화. 그리고 독자의 손이 아닌 기계적 장치에 의해서 장면 전환이 이루어지는 만화는 출판물이 아닌 영상물이 되는 것이며 영상매체로서의 역할을 갖게 된다. 그리고 만화산업의 발전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영상산업의 성장에 기여하고 있다. 

  우리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만화의 성장이 급속도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성장가도에 함께 했던 것이 만화영화라고 불렀던 애니메이션이다. 만화에 대한 일반의 선호도에 보답하기 위한 가시적 볼거리 제공의 목적. 만화는 대규모 행사 등을 통해 애니메이션을 위한 자리를 제공했다. 만화가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믿음, 또는 애니메이션은 자식 정도로 생각했던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만화는 다시 여전히 만화인체로 구석진 곳에 버려져있고, 애니메이션은 새로운 국가 기간산업의 한 측면으로 환대 받고 있다. 어찌 된 일인가? 그 믿음과 자신감에 대한 세상의 보복인가? 믿기 어려운 재앙이 아닐 수 없다.


  최근 영화계는 스크린 쿼터제의 축소에 강하게 대항하고 있다. 국내 영화의 극장 내 의무 상영일 수가 축소되는 것에 대한 반발. 소위 공인이라고 평가 받고 있는 이들이 전사 마냥 싸우고 있다. 만화가 보기에 또 일반인이 보기에는 언론과 방송을 송두리째 손아귀에 쥐고 있는 인기인들의 정치적 움직임은 제한 받아야 마땅하다. 모두가 사랑하는 그들의 입을 통해 나오는 밥그릇 챙기기. 그것이 ‘우리문화 지키기’라는 당위성을 지닌다하더라도 못 마땅하기는 매일반이다. 왜냐면 만화는 이미 오래전 쿼터제 따위의 중간 과정도 없이 일본산 만화의 강력한 폭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극장이 있어야 영화를 상영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만화 역시 서점이 있어야 판매가 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오늘 우리만화를 아니 만화를 판매하는 서점은 몇이나 되는가? 청소년 보호법의 위압적 규제 조치들은 만화의 유통망을 막아버렸다. 가뜩이나 불황인 출판계에서 그나마 호조를 보이고 있던 만화출판물의 판매수치는 올해 들어 50%이상 하락 추세에 접어들었다. 이보다 큰 재앙이 있을까. 이런 와중에도 애니메이션에 대한 정부의 지원과 애정은 남다르다. 이것이 한번 더 애니메이션에 대한 편협한 시각과 영상매체에 대한 의도적이고, 몰이해적인 견해를 갖게 만든다. 



2. 아, 애니메이션. 너 만화영화지?


  2030년 방송영상 선진국 진입, 국내 생산규모 연간 100억달러, 세계 영상시장에 적극 진출・수출 2억달러 달성. 지난 10월 문화관광부가 발표한 ‘방송영상진흥책’의 목적이다. 이번 대책의 핵심 사안 중 하나는 진흥기금 확보 방안. 문화관광부는 이를 방송진흥기금, 정부출연금, 공익자금 등에서 조달하겠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전문인들의 반응은 심각할 정도로 회의적이다. 우리는 애니메이션에 대한 정부의 지지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다. 방송에서의 국산 애니메이션 방영 비율 확정, 사전 제작비 지원, 각종 세금 감면 혜택 등등. 


  현재 국내에서 가장 각광 받고 있는 문화산업의 한 측면에는 분명 애니메이션이 있다. 그러나 과연 이 애니메이션 산업에 대한 기대가 정당한 것인지를 헤아려 봐야 한다. 미국 같은 대규모 제작사가 즐비한 곳에서도 1년에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제작편 수는 4, 5편 정도. 그만큼 돈이 많이 들고, 도박성이 높은 산업 중 하나가 애니메이션이다. 이를 극소화 시킬 수 있는 부분이 방송용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이 역시 위험천만한 산업 중 하나다. 방송용 제작물이 실효성을 얻기 위해서는 기본 26회 가량이 방송되야 한다. 30분물 1회 제작비가 26회 기준으로 1억원 정도. 26억원의 제작비는 독립 제작 자체에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는 규모이다. 당연히 여러 제작업체가 달라 붙어야 하고, 각종 부대 사업(비디오, 캐릭터 등) 등의 판매권을 양도하는 방식으로 제작비를 충당하게 된다. 그러나 투자비 회수가 즉시적이지 않은 것 역시 애니메이션 산업의 한 측면. 방송에 작품이 소개되고 작품과 관련된 부대 상품이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일정기간의 소요가 필수적인 것이다. 결국 소자본 투자자들이 일회성 자본으로 시장에 참여했다가는 망했먹기 딱 좋은 산업이 애니메이션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애니메이션이 ‘반복 구매와 시장 수명 주기의 연장 또는 재창출이 보장되는 상품’이라고 말한다. 흔한 말로 다시 말하면 ‘저거 또 해’라고 하는 재방영이나, 기타 상품으로의 인지를 통해 애니메이션의 반복구매와 시장 수명이 연장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방송의 공익성 등에 의해 비난받을 소지는 충분하다. 더군다나 정부의 규제에 의해 국산 애니메이션의 방영 비율을 높인다는 것 역시 아직 넌센스에 불과하다. 방송국에서 틀고 싶어도 틀수 있는 방송용 애니메이션이 없는 실정이다. 애니메이션에 대한 산업적인 관심이 증폭되면서 제작에 활기를 띄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방송 3사의 애니메이션 상영 시간대를 충당해내진 못한다. 그렇다면 방송사 측에서는 어린이 시간대를 축소하거나, 애니메이션 방영 시간 자체를 축소하는 방안을 세울 수밖에 없게 된다. 그나마도 방송의 어린이 시간대가 성년층 위주의 연애프로들로 체워지고 있는 통에 말이다.


  애니메이션에 대한 우리의 기대는 저패니메이션에 대한 환상을 바탕으로 한다. 최근 음성적으로 국내 시장을 장악하기 이전-방송용 애니메이션의 시장 장악은 오래전이지만-저패니메이션의 영향력은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서구 언론에 의해 애니메이션의 또 다른 이름으로 조명된 것이 일본산 애니메이션. 즉, 저패니메이션이다. 그들의 작품이 서구에서 상품성을 인정 받고 마니아 집단을 형성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우리가 향후 몇 년새에 도저히 따라 갈 수 없는 것들로 작품이 구성되있는 탓이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일본의 문화로 폭력성과 선정성을 든다. 여기에 대한 비판의 기준은 전세계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나 일본은 서구 중심의 애니메이션에서 금기시됐던 폭력성과 선정성을 자신들의 상품이 가진 특성으로 만들었고, 결국 틈새시장을 파고 드는 동인으로 삼았다. 물론 국가나 인종을 넘나들 수 있는 애니메이션의 시장성이 무한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그들의 전철을 우리가 따를 수 있을지는 한번 더 의심해봐야 한다. 최근작 <누들누드>의 낯 뜨거운 성공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 어디를 향하면 애니메이션의 성공이 보이는지. 그러나 과연 우리의 고지식한 윤리관이 일본인들의 경우 처럼 제작자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눈감아 줄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렇다면 결국 구멍은 하나.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만들기에 최선을 다하는 방법이 있다. 고연령층 대상의 애니메이션보다는 도박성이 적고 시장성 역시 넓은 것이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이다. 만화영화가 갑자기 애니메이션이라는 용어로 변한데는 이유가 있다. 그 용어 자체가 장르를 억압하고 있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즉, 만화영화는 애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인식. 이를 넘어서는 작품. 다시말해 다연령층을 대상으로 하는 만화영화를 동일한 용어로 부르기엔 부적합하다는 결론이 선 것이다. 이를 정확히 구분하자면 과거의 디즈니영화는 만화영화가 되고, 최근 디즈니 영화는 애니메이션이 된다. 그럼 우리가 만드는 건 만화영화가 아닌가. 



3. 만화가 잘 자라야 애니메이션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자식 놈이 부모보다 잘 되면? 축하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것도 부모가 일선에서 물러났을 때야 가능하지 않을까? 부모는 줄창 바닥으로 기는데 자식이 잘 나가고 있으면 왠지 부하가 치밀 것이다. 부모는 남 몰라라 하고 지들만 잘 살아 보겠다는데는 용서가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은 용서가 안된다. 국내 만화 시장이 폭격을 받고 있지만 애니메이션은 제 갈길 가기에 바쁘다. 범용적인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일본인 작화감독을 들여온다. 그나마도 우리만화에 일본색이 짙어지고 있어서 이를 막아보겠다고 몇 명 되지도 않는 만화가들이 필력을 쏟고 있다. 고유한 데생과 펜터치를 유지하겠다는 노력. 애니메이션은 이를 한 작품으로 무의하게 만들어 버린다. 아무리 애를 써서 ‘이것이 우리만화’라고 소리쳐도 죄다 허사가 된다. 일본색이 짙게 풍기는 그림체로 디자인된 캐릭터가 등장하는 애니메이션 한편이면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만다. 


  우리는 귀가 따갑게 말했다. 좋은 원작만화가 있어야 좋은 애니메이션이 나올수 있다고. 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 눈치다. 우리나라의 다음세대 주력 문화상품인 애니메이션이 만화같은 것의 원조를 받아서 되겠냐는 투다. 기실 만화는 몇 차례의 기회를 받았지만 죄다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린 이력을 갖고 있다. 고작해야 <아기공룡 둘리>와 <누들누드>정도를 성공선상에 올려놓고 있다. 기실 누가 우리만화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둔갑할 수 있는 작품을 선정해주라고 한다면 쉽게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쓸만한 작품이 없는 것이다. 여기엔 우리만화의 창작환경과 구독환경 모두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4. 만화방엔 애니메이션의 소재는 없다. 고급만화의 꿈도


  무엇이 먼저였을까? 닭이 먼저일지, 알이 먼저일지. 풀리지 않는 숙제를 지닌 이 마냥 오랜 시간을 고민했다. 그러나 그런 류의 고민이 더 이상 생산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 또는 근시안적 미봉책으로 문제 해결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한번 더 절망한다. 우리의 만화시장은 무슨 이유로 판매가 아닌 대여로 이루어져 있는가? 어이해서 작가라는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 이들마저도 쉬지않고 다작생산에만 열을 올리는가? 그 많은 작품들 중에 쓸만한 작품들은 왜 이다지 모자르며, 좋은 작품에 대한 평가 역시 나오질 않는가? 

  모든 물음의 답은 간결하고 정확하다. 대본소, 만화방, 도서대여점으로 이어지는 우리만화의 소비형태. 구입이 아닌 대여에 의한 만화소비가 이러한 물음들의 뻔한 답을 챙겨준다.  대여 형식의 만화소비가 이뤄지고 있는 바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아시아권의 만화는 스토리만화의 형태, 즉 10여권 이상의 장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화출판물의 권당 가격이 2천5백원에서 3천원 내외. 한 작품 가격이 3만원대. 비디오영화 한편의 구입 비용보다 비싸고, 출판물로서도 고가이다. 단순하게 한권의 책값은 싸지만 한작품을 구입하기에는 부담이 큰 것이 사실이다. 더군다나 그 부피도 만만치 않다. 가령 일본만화 인기에 도화선 역할을 했던 <드래곤볼>, <시티헌터>, <북두의 권>은 우리 만화팬들에게 소장가치를 인정 받았던 출판물이다. 이들 작품은 편당 30권을 넘어서는 대형 연재물이다. 한 만화팬은 이 세 작품을 서가에 꽂기 위해 그동안 소장하고 있던 만화들을 버릴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 만화팬의 견해를 말하자면 이렇다. 서가에 꽂힌 작품들을 능가하는 작품이 나온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괜히 자리만 차지하는 만화책을 사서 보고 버리는 일을 반복할 수는 없다. 그렇다. 대여라는 소비형태가 문제라고 지속적으로 지적하고있지만 판매에 적합한 만화출판물의 제작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둘째, 만화 유통 시장의 이원화를 들수 있다. 이는 대형 만화전문출판사들의 장삿속으로 나타난 기현상중 하나이다. 대원동화와 서울문화사는 초기 서점 판매용 만화출판물 제작에 열을 올리면서 일정부분 만화방용 만화(유통시장에서는 이를 ‘일일만화’라고 부른다.)의 시장을 위축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고정 판매 부수를 챙겨주는 만화방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모른척하지 못했다. 결국 앞표지에는 버젓이 ‘이 책은 대여할 수 없습니다.’라는 문구를 삽입하고서도 만화방에 판매용 출판물을 유통시킨다. 이는 마치 신작 영화를 극장과 비디오로 동시에 배급, 배포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결론을 가져온다. 대형 스크린에 대한 환상을 갖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가 집 앞에 있는 비디오방을 놔두고 극장을 찾겠는가. 더군다나 영화의 경우는 극장, 출판물의 경우는 서점이라는 유통망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최근 청소년보호법 등의 이유로 서점이 만화출판물의 판매대 설치를 꺼리고 있다. 즉, 극장을 잃어버린 영화와 같은 꼴이다. 결국 극장을 찾지 못한 영화들은 비디오로 보급된다. 만화는 이런 전후 사정을 볼 것도 없이 대여점으로 직행하는 것이 최근의 추세다. 정리하자면 대형 만화출판사들이 대여로 이루어졌던 시장에 진입하면서 만화출판물의 경제적 성장이라는 당위성을 들고 판매용 시장을 개척했다. 하지만 그 개척은 실패로 끝났고, 그들의 노력은 기존 대여만화 시장을 분할하거나 장악하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만화 작품의 질적 수준 문제다. 앞선 만화전문 출판사들이 판매용 만화책을 들고 나온 이후 우리만화는 나름의 발전을 거듭했다. 이중 가장 값진 것이 내형상의 발전이다. 과거 만화방용 일일만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그림형식과 전문적인 내용이 잡지연재 -> 단행본 출간의 과정을 거치면서 다양하게 제시됐다. 그러나 이는 주간잡지 체제가 자리를 잡으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즉, 연재 작품에 거는 독자들의 요구는 당연스럽게 한 방향으로 치우치기 마련이고 이를 수용하려는 편집진과 작가의 공조가 만화작품의 내용상 발전을 막았다. 가령 특정 장르만화의 성황이나, 독자들의 만화구독 행위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했던 연재작품의 단행본은 작품의 초기 설정 따위는 ‘나 몰라라’하는 식으로 완결된다. 사고 싶은 출판 작품이 되지 못한다. 앞선 판매용 만화출판물의 큰 축으로 대립하고 있는 대원동화와 서울문화사는 이제 대여용 만화 출판물을 공식적으로 발매하고 나섰다. 이것이 우리가 문제로 논의했던 몇가지 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그 자체로 과거로 회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만화방용 만화의 전성기를 우리는 기억한다. 공장에서 마구 찍어져 나오는 공산품과 같은 만화출판물들을 우리는 기억한다. 다시 그 과정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해 출판된 만화작품들 속에서 우리는 애니메이션의 소재를 찾기가 쉽지 않음을 짐작한다. 아니, 급하게라도 찾아나선다면 TV방송용 애니메이션이나, 비디오 전용 애니메이션의 제작에 걸 맞는 작품을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원작이 있는 애니메이션의 기획은 쉽고 경제적인 것만큼 부담감도 크다. 바로 원작이 갖고 있는 비판적 견해들을 그대로 흡수해야 한다는 점이다. 초기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은 우리만화 중 상품성이 있어보이는 몇 작품을 선정해서 극장용 애니메이션 제작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스런 패배. 이유는 기획의 부재였고, 스토리에 대한 부담감이었다. 원작과 별개의 작품을 만든다는 생각보다는 원작의 압축본을 만들었다는 느낌이 강해서 극적인 재미를 반감시켰다. 그러나 결국 이에 대한 책임은 원작만화가 지게됐고, 최근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은 오리지날 시나리오를 찾고 있다. 우리만화가들이 출판만화를 키워야 좋은 애니메이션이 된다는 외침은 어느새 거짓말이 됐다. 이 거짓말을 최소화하기 위해 만화가 변해야 한다. 애니메이션의 기대감을 만화에서 찾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변해야 한다면 답은 없다. 그러나 고급만화의 꿈을 위해 노력해야한다면 몇가지를 떠올릴 수 있다. 


  첫째, 유형화된 영상 문법에 익숙한 작품이 나와야한다. 영화의 갈래 개념으로 이야기한다면 특정 장르의 표현양식이나 이야기 구성형식에 익숙한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방안이 필요하다. 선 위주의 작화법도 특정한 표현을 위해 색 위주로 변화할 수 있다. 둘째, 연재만화의 구성을 탈피한 단편 만화적 구성이 필수 적이다. 연재만화의 이야기 구성방식은 대개 20페이지 분량 안에서 하나의 사건이 해결되고, 또 다른 사건을 만나는 형식. 결국 완결된 작품은 큰 줄기는 사라지고 수많은 잔가지들로 이루어진다. 독후감 따위를 쓸수 없게 만들 정도로 난삽하다. 이를 정리하고 페이지 수 늘리기에 급급한 창작행태를 변화시켜야한다. 단편, 단권 만화의 창작은 서점 판매에도 적합한 형태를 지닌다. 셋째, 작가의 의식변화가 따라야 한다. 적은 원고료에 만족하며 다작생산에 열을 올리는 방식이 아니라 공들인 한 작품에 대한 애정을 지녀야 한다. 여기저기 써먹으면서 유명세를 타는 캐릭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특정 작품에 한정적으로 사용되는 고유한 성격을 지닌 만화 주인공을 만들어야 한다. 덧붙이자면 이제 무신체의 인격체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높다. 이미 사이버 스타도 인격을 지니고 있으며 대중의 도덕적 심판도 받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만화 주인공에 대한 이미지 관리에도 신경을 쓰는 등, 새로운 인식을 지녀야 한다. 


  다른 나라의 특수한 경우들을 예로 들며 우리의 만화, 애니메이션이 그 길을 답습해야 한다는 논리는 무리수가 많다. 우리의 만화환경에 걸 맞는 주문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선행되지 않고,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간극을 메우는 작업이 힘들다면 만화는 애니메이션을 보호하거나 건사할 이유가 없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독특한 장르적 특성을 넘나드는 인재가 우리 앞에 나타나기 전까지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멀고 먼 사촌 간에 불과하다. 좋은 만화, 기름진 풍토에서만이 좋은 애니메이션, 값진 농작물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좋은 만화가 선행되지 않더라도 좋은 애니메이션은 나올 수 있으며 좋은 애니메이션을 위해 애니메이션에 적합한 만화가 나올 이유는 없다. 애니메이션과 만화의 관계는 좋은 만화, 고급만화로의 발전을 위한 한 교류에 불과한 것이다. 



글/ 박석환(만화평론가, www.parkseokhw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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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평론가 박석환 홈페이지. 만화 이론과 비평, 웹툰 리뷰, 인터뷰, 보도자료 등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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